마티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응급실에 중환자가 한 명 왔는데요. 상태가 썩 좋지가 않습니다.”전공의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매스컴에서 사스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 있을 때에 마티나는 꼭 사스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응급실로 실려 왔다. 사스라는 말 그대로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마티나는 거의 죽은 거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의식은 물론 없었고, 호흡도 없었으며, 겨우 심장만 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식물인간의 상태였다. 아무리 약물을 투여해도 반응은 없었고, 게다가 고농도의 산소를 이용한 인공호흡
아프간 진료 앞두고 뜻밖에 얻은 감격의 선물2002년 막상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진료를 떠난다고 하니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이미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프간에도 근본 회교 정신에서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알카에다들이 산악 지역에 남아 있고 종족 간의 갈등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아침마다 회진이 끝난 후, 아프간으로 같이 들어갈 내과 교수 한 명, 간호사 한 명과 같이 기도회를 하였다. 그리고 매일 선교단체에서 오는 그곳 정보를 가지고 우리가 준비해 가지고 가야
청소하던 냉동고에 천 개 넘는 실험 샘플이…유학시절 중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나는 요로감염증 환자의 소변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다.제대로 된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요로감염증 환자의 소변이 적어도 백 개 이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실험실 인근에 큰 병원이 있어서 나는 매주 그 병원에 찾아가 요로감염증 환자의 소변을 얻었었다. 하지만 매번 갈 때마다 하나나 두 개 밖에 얻을 수가 없었다. 실험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개수였다.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출근을 했더니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
무심히 펼쳐진 하박국 3장, 길을 예비하시다 1986년 나는 논문을 쓰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도착한 첫날, 나는 예배당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하나님, 제가 여기서 일 년에 두 편씩 네 편의 논문을 쓰고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정말 예수님 잘 믿고 싶어요.’미국에는 ‘아나신’이라는 강력한 진통제가 있었다. 나는 두통을 잊고 실험에 매달리기 위해, 그 진통제를 땅콩 먹듯이 먹어댔다. 확실히 그 약은 두통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카페인이 많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속이 쓰렸다. 나는 2000개의 진통제와
아픈 아내와 딸 두고 입대…찬송가를 듣다나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았다. 그런 나를 장인어른은 바쁜 와중에도 교회에 온다며 예뻐하시기만 하셨다. 나는 딸만 넷인 집의 맏사위이기 때문에 아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죄의식도, 부족함도 느끼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3개월이 지난 후 나는 군산 개정병원에 소아과 과장으로
아버지 장례 후 “교회 못 나간다” 통보받아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갑자기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는 나를 불렀다. “얘야, 할 말이 있다. 한 집안에서 두 신을 섬기면 신끼리 부딪히기 때문에 우환이 끓는단다. 우리 집에서 너만 예수를 믿기 때문에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너 이제부터 교회 못 나
가요 ‘황포돛배’를 부르고 숭실중학에 입학했다나는 칠남매 중에 막내로, 믿지 않는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방은 물론 부엌과 대문간에 커다란 떡시루와 막걸리를 놓고 무엇인가를 늘 빌곤 했다. “뭐예요? 엄마” “이렇게 귀신들을 잘 먹게 해줘야지만 집안이 편안하단다. 안방에 가면 안방 귀신이
누워있던 16살 우즈벡 소녀가 걷기 시작했다 ▲ 세브란스어린이병원장 김동수 장로는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지를 찾아다니며 의료사역을 펼쳐왔다. 사진은 김 장로가 해외의료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 해외의료봉사였다. 그 동안 나는 수많은 해외 재난지역에 긴급 의료구호 활동을 해왔고 근래에 들어서는 MBC와 함께 ‘코이카(
“쓰임받았을 뿐…모든 것에 감사” “내가 실력이 있나, 성격이 좋은가. 누구도 나는 목사가 못된다고 했다. 내가 봐도 나는 목회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붙드셨고, 나는 그 은혜가 감사해서 예수님만 사랑했을 뿐이다.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28
귀한 ‘회복의 열매’ 나누며 살겠다 ▲ 노숙자와 노인 자활자립을 위해 마련한 농장에서 김도진 목사가 공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내 나이 올해 77세를 맞았다. 40대 초반까지 나는 축복이나 소망이란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한 번의 실수로 삶을 짓밟힌 사람들에게 세상은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 세상은 실패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노숙인들 ‘나눔의 기쁨’을 얻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빛과 소금이 그 가치를 발하려면 어둡고 썩은 곳에 있어야 한다. 빛의 사명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요, 소금의 사명은 썩는 것을 막는 것이다. 가나안교회는 이 땅에서 가장 어둡고 음습하고 썩은 곳에서 지난 28년간 빛과
‘남이 싫어하는 일 먼저 하자’ 가르쳐1997년 대한민국은 유래없는 외환위기 IMF사태를 맞았다. 기업들이 도산했고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아들과 아버지들이 거리로 나왔다. 거리로 나온 그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거리에서 노숙하며 그들의 삶은 바닥으로 내몰렸다. 그렇게 노숙인들이 급증했다. 당시 노숙인들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대안
IMF 사태, 오히려 교회 문 활짝 열어청량리 588 한복판에서 늘 깡패들의 위협과 협박에 시달렸지만 가나안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을 키워갔다. 마치 두 수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이, 가나안교회는 부흥과 환난이 맞물려 이어졌다. 그러나 항상 나누어 주어야 하는 노숙인 사역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교회로 밥을 먹으러 몰려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예측할
사창가 한복판에 교회, 전쟁 시작되다 ▲ 가나안교회가 마련한 두 번째 예배처소는 청량리 사창가 한복판이었다. 그곳에서 가나안교회와 김도진 목사는 깡패들의 위협 속에서 노숙자 사역을 이어갔다. 28년 동안 가나안교회에서 노숙인 사역을 하면서 늘 하나님께 위로와 힘을 받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선한 일을 하고, 소망이 있고, 보람 있는 삶이었다. 정말로 위
노숙인과 악전고투, 희망이 싹텄다 ▲ 김도진 목사는 폭력이 난무하는 청량리에 가나안교회를 개척했다. 가나안교회는 폭력배와 노숙자가 드나들면서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이래저래 경찰서와 관계가 많은 교회가 됐다. 나는 목회자로서 자질도 실력도 없었다. 인격까지 다듬어지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려 했던 신대원 졸업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