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우리 총회가 교회사의 격동 속에서도 보수주의 개혁신학을 지킬 수 있었던 중심에 51인 신앙동지회가 있었다. 신앙동지회를 이끌었던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의 <신앙난제 선평>을 통달했기에 어떤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보수신학의 기초가 있었다. 그 견고한 신학과 영성의 토대 위에 51인 신앙동지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51인 신앙동지회를 주도한 정규오 목사 신앙의 태생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남장로교 광주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김성국 장로가 전남 나주군 다도면에 방산교회를 세운다. 어린 정규오는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미 남장로교 신앙의 영향을 받는다. 미남장로교는 어떤 곳인가? 3·1운동 때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도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남장로교는 가장 앞장서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영적 기초가 되었다.

당시 미국 선교본부에서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볼 때 일제의 만행이 너무 잔인하고 반민주주의적, 반휴머니즘적, 반근대적이었다. 선교사들은 고통당하는 우리 민족의 고난과 아픔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정교분리 원칙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신앙양심과 소신을 가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 박애, 인권을 가르치며 백성들의 잠든 의식을 깨우고 계몽시켰다. 그 결과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은 미션스쿨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서 3·1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사실 3·1운동 당시 대부분 목사와 장로들은 정치적 행보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서는 것을 꺼렸다. 그럴 때 남강 이승훈 장로는 당시 영성운동의 거두요, 목회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던 길선주 목사를 찾아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승훈 장로의 간곡한 호소에 사회 참여에 거리를 두고 있던 길선주 목사가 방향 선회를 하자 목회자들의 인식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목양의 영역이 교회를 넘어 민족적, 국가적으로 확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 숫자는 적었지만 3·1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독립운동을 하게 되면서, 민족 종교로 자리매김하며 폭발적 부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3·1운동의 정신이 한국교회 밑바닥에 스며들었고 이 정신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까지 연결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가결을 해 버린 것이다. 이때 찬성하도록 유도했던 단체가 조선기독교연합회였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일본 기독교와의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한 조직이었는데, 부산 동의대 김인호 교수는 이들을 ‘황국신민의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3·1운동 정신을 이어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한다. 특히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세운 미션스쿨을 스스로 폐교까지 하면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특별히 이런 신앙적 저항이 호남지역에서 두드러졌다. 그런데 바로 그 어린 정규오가 그런 신앙의 순결성과 순수성을 이어 받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박형룡 박사의 책 <신앙난제 선평>을 통달하였고 51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니까 51인 신앙동지회는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했던 그 신앙의 지조와 영성이 흘러간 것이다.

그래서 김재준 박사가 문서설을 비롯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칠 때 51인 신앙동지회는 저항하며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정신이 급기야는 WCC 반대로 연결이 된 것이다. 비록 교단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긴 하였지만 우리의 선진들은 허허벌판 황무지에서 다시 새로운 교단 부흥의 눈물겨운 불멸의 역사를 기록해 준 것이다. 오늘 우리도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그 신학적 순수성과 신앙의 순결성을 견고하게 구축할 때 교단 100년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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