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나는 몇 번에 걸쳐 우리 교단 형성 과정에 있어서 '51인 신앙동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정신과 영맥을 이어 받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들은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야성의 질주로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33회 총회 때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신학 사상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에 그들은 목사가 되어 총회 신학사상의 근간이 되었고, 총회의 정치적 중심세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총회에서 정치적인 영향력만 끼친 것이 아니라 먼저 신학을 앞세웠다. 정치를 할 때도 “이것이 신학에 맞나 안 맞나,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철저하게 분별했다. 특별히 그들은 박형룡 박사를 앞세우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 섰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그들에게 박형룡 박사는 아이돌이었으며 그의 신학을 우상화하다시피 할 정도로 똘똘 뭉쳐서 견고한 신학적 진을 구축했다. 그러니까 전국의 모든 교단 산하의 교회들이 신학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용산신학교를 세우고 마침내 총신대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계속 연재를 하겠지만 용산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김윤찬 목사가 매킨타이어에게 편지를 보낸 사건, 총신대를 세우기 위한 백남조 장로의 눈물겨운 헌신, 명신홍 목사의 사투를 건 도미 모금운동, 그리고 13신앙동지회의 순백의 헌신 등은 우리 교단의 모든 목사와 장로들이 알아야 할 눈물겨운 역사다.

훗날 정치 현장에서 우리 교단을 이끌어갔던 정규오, 이영수 목사도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떠받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교단은 오직 보수신학과 순결한 영성운동, 경건한 삶을 바탕으로 총신을 세우고 총회회관을 건립하며 눈물겨운 교단의 혁신과 성장을 이루어갔던 것이다. 이런 신학적 기반은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신학적 정체성을 이루게 하였다.

당시 우리 총회는 이런 보수신학의 기반 위에서 찬송가도 <합동찬송가>를 사용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리주의를 추구하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때 상황으로는 <합동찬송가>를 부르는 것 자체도 우리 교단의 신앙적 정체성을 키우는 큰 기폭제가 되었다. 1960년 중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창 이농현상이 일어날 때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우리 교단 교회의 성도들이 <합동찬송가>를 쓰는 교회를 찾아다닐 정도였다. 지금도 찬송가를 따로 쓰자는 말이 아니라 그때 <합동찬송가>가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발전시키는데 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소위 말하면 우리 교단만의 브랜드 신앙과 영성을 이루게 하였고, 그 신앙과 영성이 축적이 되다보니 교단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신앙과 영성이 서로 연결이 되고 네트워크화 되어서 오늘날 세계 최대 장로교단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정치를 하거나 권력을 잡는데 있어서도 항상 이념과 사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적 타락과 몰락을 맞게 된다. 하물며 우리 총회이겠는가. 우리 총회가 다시 살고 앞으로 50년, 100년의 미래 그림을 그리려면 다시 신학적 인프라가 견고하게 구축 되어야 한다. 그 인프라 위에서 총회 리더들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총회를 섬길 때 다양한 사역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총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장자교단이라 하더라도 신학이 죽어버리고 자유화되면 지금의 장자교단의 명예와 위용은 더 큰 몰락을 위한 계기가 되고 서곡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총회는 어떠한가. 먼저 우리는 우리의 총신과 우리 교단 산하의 지방신학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또 총신의 교수들을 비롯하여 지방신학교를 섬기고 있는 교수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호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 역시 과거 박형룡 박사처럼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총회 100년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적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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