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이영수 목사는 교단과 신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미래지향적 사고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대를 멀리 보고 넓게 봤다. 사당동 총신으로는 세계적인 신학교로 발전하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부도 행정상 지방분산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신대원 부지를 물색하던 중 경기도 양지에 있는 23만평 땅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그 땅은 군산시에 있는 백화소주 사장 강정중 씨 소유였다. 그 땅에 백화소주 공장을 지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소주공장을 만들려면 물이 나와야 하는데 물도 안 나왔다. 회사의 채무를 갚으려고 하던 중에 당시 재단이사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이영수 목사가 강정중 씨를 만나 설득한 것이다.

당시에 최소한 5억원을 주고 사야 하는데 8000만원을 깎아서 4억2000만원에 계약했다. 또 4억2000만원을 받더라도 5000만원은 헌금하기로 약속했다. 실제로는 3억7000만원에 매입한 것이다. 게다가 시가 1억이 넘는 관상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그대로 인수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2억7000만원에 산 것이다.

그러므로 이영수 목사는 천하의 흥정가였다. 한마디로 금싸라기 같은 땅을 평당 1000원을 주고 샀다. 지금은 수천억원이 넘는다고 하니, 재산상의 가치는 물론 얼마나 우리 총회의 값지고 빛나는 자산인가. 그 결과 총신은 세계적인 신대원을 이룬 것이다. 양지캠퍼스 없이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우리 교단이 어떻게 세계 최대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이영수 목사는 교계 연합활동의 주역으로도 앞장섰다. 당시 우리 합동은 <새찬송가>, 통합은 <개편찬송가>, 다른 교단은 <합동찬송>가를 쓰고 있었다. 그때 이영수 목사가 앞장서서 <통일찬송가>를 만들었다. 일찍이 그는 교단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연합활동을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만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74년 1월 17일, 교단의 지도자 20여 명이 유성에 모여서 교단의 진로와 정책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영수 목사가 주도한 모임은 비생산적인 교권 쟁탈전을 지양하고 교회의 힘을 전도에 집중하여 ‘일만교회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 모임의 결의문은 첫째, 우리는 우리 총회의 총화를 열망한다. 둘째, 우리는 80년대까지 일만교회 운동을 전개한다. 셋째, 우리는 국내외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합의가 그 해 9월 총회에서 교단 정책으로 채택되어 폭발적인 교회성장운동과 개척운동의 견인차가 되었다. 이영수 목사는 일만교회운동의 실행위원회 기획실장을 맡아 전국교회를 순회하며 도시교회와 노회들이 의무적으로 개척교회를 설립하도록 호소하고 독려했다. 이 운동은 우리 교단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장자교단으로 우뚝 서는 발판이 되었다.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으로 설 수 있었던 부흥과 성장에 이영수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나는 교단발전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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