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감염병 예방과 진단 그리고 치료 강국이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두창(痘瘡)이었다. 흔히 마마 또는 천연두라고 부르는 감염병이다. 1790년 건륭제 팔순절을 축하하는 진하사 수행원으로 북경에 간 초정 박제가는 두창 예방 현장을 목격한다. 나을 무렵에 이른 두창 환자 몸에서 헌데딱지를 떼어내 성한 사람 코에 붙여주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두종(두창 치료용 바이러스)은 북경에만 있었다. 한 여름에는 5일, 한겨울에는 15일이 지나면 두종은 효과가 없었다. 북경에서 한양까지 운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직접 두종을 개발해야만 했다.

1893년 의료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에비슨(오른쪽 두 번째)이 제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박서양이 수술용 가위를 건네고 있다(출처=연세대학교 동은의학박물관).
1893년 의료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에비슨(오른쪽 두 번째)이 제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박서양이 수술용 가위를 건네고 있다(출처=연세대학교 동은의학박물관).

박제가는 건륭제의 황명으로 편찬한 의학백과사전 <의종금감>에서 두창 예방법과 치료법을 가려낸다. 영평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1796년 두창 예방접종에 사용할 두종을 직접 완성한다. 두창에 걸린 사람에게서 구슬진(고름) 헌데딱지를 확보한다. 그래서 인두법(人痘法)이라 한다.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헌데딱지를 물에 불려서 코에 주입한다. 물에 불린 균으로 두창을 예방하니 수묘법(水苗法)이라 부른다. 이방과 관노 아이 그리고 조카에게 접종해서 성공한다. 박제가는 포천 사람 이종인에게 수묘법을 알려주고 두종을 건넨다. 한양 북부 양반 자제 100명에게 두루 접종한다. 정조 23년(1800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 예방접종이다.

이즈음 조선 조정에서는 서양의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신종 감염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1821년 조선에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한다. 1859년 다시 창궐한다. 조선 사람들은 호열자를 쥐통이라 불렀다. 쥐 귀신이 몸속으로 들어와서 온통 뒤흔드는 질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쥐통에 걸리면 고양이 그림을 내 걸었다.

1895년 세 번째로 콜레라가 창궐한다. 궁내부대신 유길준이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서 고종 임금의 시의를 맡았던 에비슨에게 콜레라를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에비슨은 방을 붙여서 백성들에게 콜레라 대처요령을 알린다. “병균이 뱃속에 들어가서 급속하게 번식하여 콜레라가 발병합니다. 귀신이 아닙니다. 손과 입을 깨끗하게 씻고, 음식을 완전히 익혀서 먹고, 막 끓여낸 숭늉을 마시면 콜레라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에비슨은 생리식염수를 피하에 주사하는 치료법을 개발한다. 혈액 탈수를 방지하고 원활하게 순환시킴으로써 콜레라를 이겨내도록 돕는 방식이다. 생리식염수 정맥 주사 치료법으로 발전해서 오늘에 이른 치료법이다.

1904년 에비슨은 감염병 예방 시스템 구축에 나선다. 제중원에서 토끼를 사육한다. 토끼에게 바이러스를 주입한 뒤 척수를 뽑아내서 보관한다. 매일 한 마리씩 21일 동안 계속 모두 21병의 척수를 확보한다. 바이러스가 충분히 약화된 1번병부터 차례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은 건국과 정부수립을 거쳐 급속한 경제성장과 세계화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의료체계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왔다.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쳤기에 신천지교 집단감염 상황에서도 국민과 정부 모두가 투명하고 정직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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