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목사(열린교회)

고난의 어두운 밤일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만사 우연히 돌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것들을 통제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43:18~19).

시인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의 성품을 배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의 경험은 쓰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그것이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이에 시인은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우리는 시인의 기도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발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원수들도 사용하십니다.

시인은 원수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나를 인도하시고”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에 있어서 친구들만이 아니라 원수들도 사용하심을 보여줍니다. 원수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당하는 고통이 우리를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려고 악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만났지만 주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창 50:20). 그래서 우리가 당한 나쁜 일도 결국은 좋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들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원수가, 그리고 나쁜 일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선하신 주님을 붙드는 믿음을 통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로 그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을 위해 복을 비십시오(마 5:44). 어떻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반복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그들까지 불쌍히 여기게 되면서 주님만 의지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마 6:13).

둘째, 하나님은 ‘주의 의’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주의 의’는 방향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주님의 의를 가지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구약에서 ‘의(義)’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이것을 믿어라”고 하신 바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이것에 부합한 것만큼 의로운 것이고, 어긋난 것만큼 불의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은 ‘인간의 의(human righteousness)’가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의는 ‘주의 의’, 곧 ‘하나님의 의(divine righteousness)’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롬 3:10).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 자들은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구원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당신이 의로우신 분이기에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가 아니라, 당신의 의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인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다” 또는 “나는 저런 악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뛰어났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을 스스로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가 아니라 ‘주의 의’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율법적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약 3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희미한 계시의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 의를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해 밝히 드러난 지식이 있습니다. 계시가 모자란 게 아니라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하신 고난의 깊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였습니다. 그분이 당하신 치욕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회복을 바랄 때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어떠한 죄인인지,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지를 마음에 새깁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디에서 소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믿음으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의’를 보여주십니다. 그의 의로 인도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은혜로 그 의를 덧입혀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이 사랑을 굳게 붙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시인은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당신의 길을 나의 면전에 똑바르게 해 주소서”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길’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길이 아닙니다. 객관적 실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주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삶의 기둥으로 삼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더라도 사셨을 그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 길은 항상 있습니다. 항상 똑바릅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모릅니다.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지저분하고 소란스럽게 살아갑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길을 곧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주님의 길이 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을 따라 살지 않는 사회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5~136)

그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길이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인들을 진멸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길 바랐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가운데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시 108:5).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마 6:10).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들에게 펼쳐져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올 한해 우리가 이 기쁨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신자도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밤을 지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진실한 사랑으로 그분을 붙들게 합니다. 그때 마음 안에서 죄는 분리되어 나오고, 심령은 정결해집니다. 그 일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어둔 밤을 겪은 것이 찬송의 이유가 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경건한 신자라고 해도 어찌 고난이 좋을 리 있겠습니까? 누가 고통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로 피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시인은 주께 피하는 자의 복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1~12)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분은 이름으로도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셨습니다(출 33:17, 마 10:30). 지금은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밤일지라도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그분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새벽의 여명은 밝아올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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