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인 목사(청량교회·총신대학교)

창조세계와 조화로운 공동체 만드는 것이 청지기 사명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


 

송준인 목사(청량교회·총신대학교)
송준인 목사(청량교회·총신대학교)

자연의 고통과 반란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 창조세계가 요즘 고통을 겪고 있다. 특별히 이 지구는 엄청난 상처를 입고 비명을 지를 정도이다. 오늘날 지구는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는 중환자와 같은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인구, 기아, 식수, 쓰레기, 에너지 문제 등은 계속 심각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져 창조의 청지기인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오히려 창조세계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철저한 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자연관은 인간의 죄성의 결과로 자연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4장 3절에서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슬퍼하며 거기 거하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죄로 인해 가뭄이나 자연재해가 생겼다고 말했다.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사 24:3~5)

이처럼 땅의 황폐함은 인간의 죄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교만, 자기영광, 풍요, 탐욕과 탐심 같은 자아중심에서 비롯된 인간의 죄악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도덕 법칙과 어긋난다.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폭설과 기상이변, 인도에서 일어난 히말라야 빙하의 붕괴로 말미암아 발생한 강물 범람으로 200명 가량이 실종된 사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진과 쓰나미, 미세먼지,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와 세균 등은 인간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고통에 처하게 된 자연의 반란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준다. 첫째는 전체 피조물이 상호의존적이어서 공동운명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치유하는 데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워진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책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이 말씀을 받아들임에 있어 한편으론 흥분이 되고, 다른 한편으론 위험할 수 있다. 흥분이 된다는 것은 우리 모든 인간이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이다. 위험하다는 것은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과 관련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땅에 대한 지배권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다. 나는 땅을 짓밟고 땅에 있는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이 오늘날 생태학적 재앙을 가져오는 데 한몫을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림의 권한은 언제나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고 섬김과 돌봄으로 일하는 정원사요, 청지기의 역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공간이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살아가야 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복지가 번성하는 지구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식량이 풍족하게 생산되는 지구, 모든 사람이 마시기에 적합한 물과 숨 쉬기에 적합한 공기가 계속해서 공급되는 숲이 있는 지구, 중요한 용도에 가장 오랫동안 아껴 쓸 수 있는 재생 가능한 자원이 있는 지구여야만 인류의 복지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수용해야 한다.

인류가 생존을 위한 충분한 자원을 공급 받고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다.

자족의 가치관

현대 소비사회의 문제는 정치, 경제적인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인간의 가치관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인간이 자신의 소유욕과 부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환경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지구 자원의 물리적 한계 및 생태학적 한계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윤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을 요청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족할 것을 강조한다.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라고 기도한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고 고백한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는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교훈한다.

지구환경 위기에 직면해서 인류는 금욕과 절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금욕과 절제는 구원 받은 자의 새로운 생활양식이지, 중세 수도원주의와 같은 구원을 위한 업적이 아니다. ‘새로운 금욕’이란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하향 조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금욕과 절제를 모든 신앙인의 덕으로(벧후 1:6), 그리고 성령의 열매로 가르치고 있다. 생존의 위협 아래 있는 빈민들에게 환경보전을 위한 금욕과 절제의 강조는 무리한 요구이지만, 초대교회가 풍족해서 금욕과 절제의 덕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기원후 125년경에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게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들의 일용품이 풍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3일씩 금식하면서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습니다.” 기독교적 절제의 참 의미는 축적하기 위해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선하고 구체적인 행동이다. 금욕과 절제는 인간이 이웃과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윤리적 삶의 방식이다.

한국 기독교의 절제 운동사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부터 청교도적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사회의 뿌리 깊은 미신 문화, 축첩 제도, 음주, 흡연의 폐해 등을 고치고자 청빈 절제 검약과 경건생활을 강조하여 사람들에게 금욕적인 종교로 인식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생활강령 7개조는 예배, 주일성수, 효도, 순결, 인가귀도, 근면, 정직, 술과 담배, 도박과 아편의 금지로 되어 있었다. 특히 일제 통감부가 전매사업으로 민족의 자본을 수탈하려하자 교회가 금주운동을 벌였다. 1930년대 한국교회에 있던 절제부에서 각 교회에 요청한 내용에도 그 절제운동의 방향이 잘 나타난다. 첫째, 창기, 담배업, 주조업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상점이나 돈을 빌려주지 말 것. 둘째, 각 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 학교에서는 금주 및 금연 교육을 시킬 것. 셋째, 주일학교 공과 중에 절제 공과를 넣어 절제를 교육할 것. 넷째, 각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절제 생활을 교육할 것. 다섯째, 교역자들이 이 일에 모범이 될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였던 한국의 초대교회는 시대 상황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이 땅의 썩은 문화를 변혁시키고 나라를 살리는 방법으로 절제운동을 일으켰다.

예언자적 사명

지금 생태계 위기로 인해 지구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그다지 큰 힘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언자적 입장에서 회개를 외쳐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이 끝까지 바른 진리를 외쳐야 할 선지자적 사명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근접한 방식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권리는 없다. 세상이 오염된 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의 깨끗한 물 한 바가지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작은 노력을 다 함께 모아야 할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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