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기독문화 숙성시켜 발효

여러 교파 교회 공존·융합, 100년 가까운 눈부신 복음역사 써내려가
최초 침례교회·감리교 전시관 등 곳곳에…성지순례코스 개발 활기


충청도는 전통적으로 감리교 강세지역이다. 초창기 선교사들이 맺었던 예양협정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감리교회들이 많다. 그러나 충청도 남부지역의 경우는 미국 남장로교의 영향권에 있었고, 성결교 침례교 등 다른 교단들도 일찍부터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선교와 사역의 장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논산군 강경읍은 그런 특성이 가장 화려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한 때는 우리나라 3대 시장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던 강경장의 영향 때문인지, 이 지역에는 갖가지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것들은 이곳의 특산물인 ‘젓갈’처럼 서로 융화되고 조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교파의 교회들이 공존하면서, 각자의 개성을 살려 100년 가까이 눈부신 복음의 역사를 써내려갔고, 결국에는 복음을 향한 순전한 헌신과 뜨거운 민족애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일치를 이루며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이곳만의 기독교 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 ① 신사참배를 선도한 강경성결교회의 사적을 기념하는 조형물.
② 병촌성결교회 66명의 순교자를 추모하는 기념탑.
③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던 강경침례교회 옛 예배당.
④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북옥감리교회 한옥예배당.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

오늘의 여행은 강경읍내 중심을 차지한 옥녀봉에서 시작한다. 금강의 유유한 흐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 정상 부근에는 허름한 옛 집 한 채가 남아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폐가나 다름없어 보이는 이곳이 사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던 현장이다.
강경과 인천을 배로 오가며 포목장사를 했던 지병석씨가 1895년 서울에서 펜윅(한국명 편위익)과 파울링 등 침례교 선교사들을 만나 전도를 받고, 최초의 침례교인이 된 것이 발단이었다. 강경으로 돌아온 지병석씨는 선교사들까지 모셔와 이듬해 2월 9일부터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강경침례교회와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시작이었다.
점점 교세가 불어난 강경침례교회는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와 더욱 활발한 복음사역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침례교단 최초의 총회가 이곳에서 열리는가 하면, 오랫동안 교회당이 교단 본부 역할까지 감당하는 등 빛나는 시절을 누렸다. 반면에 일제하에는 전치규 목사가, 6·25동란 중에는 이종덕 목사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강경에는 한국 침례교회의 보고라고 할만큼 소중한 유산들이 곳곳에 간직되어있다. 옥녀봉의 지병석 집사 자택은 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38호로 지정받은데 이어, 침례교단으로부터도 교단 사적지로 지정돼 복원을 앞둔 상태이다. 또한 금강과 강경천의 합류지점인 이종덕 목사의 순교터에도 5년 전 순교비가 세워져 고인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신사참배 거부 주도한 강경성결교회

옥녀봉 정상을 천천히 산책하다보면 삼일운동기념탑과 안순득여사 추모비 등 이 지역 애국인사들을 기리는 조형물들을 만나게 된다. 강경은 특히 애국애족의식이 강했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민족의 격동기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 불의에 앞장서 항거한 이들이 많았고, 기독인들 또한 그 대열의 중심에 서있었다. 바로 추모비의 주인공 안순득여사가 강경중앙감리교회 속장 직분을 감당한 기독인으로 알려졌고, 전국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펼친 인물들도 강경성결교회의 성도들과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강결성결교회 앞마당에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10월 11일 일어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기념하는 ‘최초 신사참배 거부선도 기념비’와 함께, 그 주변으로 여러 조형물들과 연못이 조성된 소공원이 설치되어있다.
1924년 10월 11일은 옥녀봉의 신사에 학생들이 단체로 올라가 참배하기로 정해져있던 날이었다. 그러나 당시 강경성결교회를 이끌던 백신영 전도사와 강경소학교 교사로 있던 김복희 선생이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도록 주도했다. 여기에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학생 57명을 포함해, 62명의 학생이 동참했고 당연히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조선총독부에서 관계자가 내려오고, 당시 주요 신문에 이 사건이 보도될 만큼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결국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생들은 퇴학처분을 받고, 김복희 선생은 스스로 사직하는 등 적잖은 후유증을 겪어야했지만, 일제의 야욕에 제동을 걸고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큰 공헌을 한 사건으로 지금까지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다.

▲ ⑤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는 은성교회 예배당.
⑥ 강경제일감리교회 역사전시관에서는 강경 일대 교회역사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북옥감리교회  한옥예배당

강경성결교회와 관련해 옥녀봉 자락에는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근대문화유산 제42호로 지정된 강경북옥감리교회 한옥예배당이다. 전통한옥의 형태에, 서양식 예배당의 구조를 결합한 독특한 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희소가치가 있는 1920년대 건축물이다.
김제 금산교회나 익산 두동교회처럼 ‘ㄱ’자 모양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유교적 사고방식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남녀가 각각 드나드는 출입문을 별도로 두고, 예배실 가운데는 남녀석을 구분하는 휘장을 칠 수 있도록 고주를 설치하는 이른 바 ‘칸막고’ 형태의 공간배치가 눈길을 끈다.
이 한옥예배당은 기미년 만세운동 당시 강경을 방문했다가 어느 일본인의 폭력으로 크게 다친 영국인 존 토마스 목사가, 귀국 직전 가해자로부터 받은 위자료 일부를 헌금하여 건축이 이루어졌다. 당초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다가, 교회가 부흥하여 이전하면서 북옥감리교회에 매각된 바 있다.


제일감리교회 역사전시관

강경읍내 또 하나의 감리교회이자, 이 일대 최대 규모로 성장해있는 강경제일감리교회는 지역을 대표하는 교회 위상에 걸맞는 역사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최초의 담임목사가 파송된지 100주년이 된 해인 2008년 개관한 역사전시관에는 제일감리교회 뿐 아니라, 앞서 소개한 여러 교회들의 역사가 교파를 초월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역사전시관에서는 논산 일대 최초의 사립학교인 만동학교, 우암 송시열의 강학소인 팔괘정에서 문을 연 만동여학교, 이화여전 출신 김복희 선생을 초빙해 운영한 유치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문을 연 웨슬레중학원과 강성중학교, 그리고 지금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비전센터를 운영하며 제일감리교회가 지역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오랜 세월 애쓴 노력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강경읍내의 교회들은 하나같이 우리 민족, 그리고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들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도 이런 점들을 높이 평가해 강경일대를 중심으로 기독교성지순례코스를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대외 홍보에 나서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을 향한 순수한 열정,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밖으로는 의심받고, 안으로도 스스로 회의하는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강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다시 아름다운 시절을 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선배들이 온 몸으로 일러준 가르침 앞에 겸손히 무릎을 낮춰야 할 것이다.

논산 일대의 다른 문화유산들

병촌성결교회 순교기념탑
강경읍에서 지척에 있는 성동면 개척리의 병촌성결교회는 6·25 전쟁통에 66명의 성도들을 잃었다. 1950년 9월 27일과 28일, 서울에서는 국군과 연합군의 수도 회복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곳에서는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 인민군들의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틀 동안 무참하게 살해된 이들 중에는 임신한 몸으로 젖먹이를 품에 안은 아낙네도 있었고, 일가족 10명이 함께 찬송을 부르다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다. 1956년에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순교자기념교회가 세워졌고, 1989년에는 기념탑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은성교회 예배당
은진면 성덕리에 있는 은성교회는 독특한 외관의 예배당으로 인해, 무심코 지나치던 이들의 발걸음까지도 붙잡는다. 시원스런 아치 형태로 꾸며진 출입구나, 건물들 사이로 오밀조밀하게 이어지는 사각형의 흐름들이 마치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에서 느꼈을 법한 이국적 정취를 자아낸다. 예배당 전면의 종탑은 전형적인 1950년대 스타일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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