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참된 지식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
하나님에 대한 지식 배울수록 양심은 더해지고 행함으로 드러나
 

양심적일까?

여기저기 곳곳마다 들리는 소리는 마치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불의가 대세를 이루고, 부도덕이 팽배하는 것을 보는 시편이 떠오른다.

도대체 교회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아니 사회는 교회를 기대고 싶지 않을 것이고, 아예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이 사회가 이렇게 양심 없는 사회로 치닫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후배들과 자녀들은 무엇을 보고 내일의 희망을 가질까?

세상에서 양심을 찾기 어렵다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분이 지배하는 교회를 다니는 자들에게서는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세상의 양심마저 찾을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거룩하고 경건한 자들이 양심을 상실하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불행 외에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상식에 어긋나는 삶을 사는 자들이 신앙인들이라 명명되어선 안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겠다. 양심을 통해 그릇 행하고 있는 자들을 바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듣고자 한다.
 

양심이란?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된 동시에 이 둘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전혀 무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육체적 훈련이 영적 훈련일 수 없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사 기독교인들이 경건한 자들을 혼란시키고 있고, 사회도 어지럽히고 있다.

이와는 달리 영이 잘되면 육도 건강하고 복을 받는다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과거 율법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무리들을 위해 가시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시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오실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았다. 심지어 가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육과 영은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독교강요> 1권 5장 5항). 그 영에는 양심이 자리잡고 있다. 어떤 때는 영을 대표하는 것을 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양심이란 그릇에 믿음이 담겨 있다고 성경은 표현한다(딤전 3:9).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12항). 또 양심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기에 누구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1권 3장 2항). 누구든 종교성을 가진 것을 보아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연과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으로 심판을 누구든 받게 된다(롬 2:15).

양심이란 무엇일까? 칼빈은 양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4권 10장 3항). “마음과 지성을 가진 자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할 때 그들은 안다고 한다. 양심이란 말은 지식이란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양심이란 영어로 ‘칸션스(conscience)’이다. 칸션스라는 영어는 라틴어 ‘콘슈엔티아(conscienti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두 단어의 복합어로 ‘콘(con)’과 ‘슈엔티아(scientia)’이다. ‘콘’이란 뜻은 ‘함께’라는 의미고, ‘슈엔티아’는 ‘안다’라는 의미다. 즉, ‘~와 함께 안다’는 의미다. 또 라틴어 슈엔티아는 영어 사이언스(science)로 표기되어 과학이란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결국 칼빈이 양심의 정의를 ‘아는 것’이라고 내린 것은 정확한 것이다.
 

다른 양심

문자적으로 양심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지식에 따라 양심이 다를 수 있다. 그렇다.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정도는 달라진다.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척도는 다르다. 누가 아느냐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문화와 시대에 따라 습득한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같은 문화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도 양심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시대마다 어디든 생기는 것은 그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학식에 따라, 가정 문화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누구든 자신의 지식과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누구에게는 이것이 옳은 것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바른 지식이 갖춰지면 바른 양심을 가질 수 있다고 사회학에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궁극적으로 그 양심은 바꿔지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양심

기독교는 사회와 다른 양심의 기준을 갖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은 안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양심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진다. 개인과 문화에 따른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 양심을 갖고 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하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은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3권 2장 6항).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믿음이 양심이란 그릇에 담겨 있다고 말한 것이다(딤전 3:9). 믿음도, 양심도 모두 지식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양심도 동일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중생된 자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요 6:45). 주님께 오는 자는 배우는 자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마 11:29). 배워야 하는 이유는 호기심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양심의 가책

감람산으로 가려 하실 때 예수님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다(요 8:3). 이들은 신명기 22장 23~24절과 레 20장 10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의도했다. 이것을 파악한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6).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또 알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신 후 다시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8).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요 8:9).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간곡한 부탁에도 요압은 듣지 않고 그를 죽였다. 그러자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삼하 19:3). 유사한 현상이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일어났다.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에 그들의 고소하는 악행과 악한 의도를 멈추도록 하셨다. 땅에 무엇인가 쓰인 것이 그들의 양심을 찌른 것일까? 우리가 말씀을 쓰신 것을 모른다는 것은 말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암시한다.
 

양심적 행위

하나님은 영이시다. 인간의 영, 즉 심정 또는 양심을 살핀다. 내면을 살핀다. 영의 상태와 기능들을 살핀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저울질하신다(3장 23장 10항). 이와는 달리 인간은 외형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인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에 따라 판단한다. 인간의 양심은 인격의 대변이요, 내면의 세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 지식인 믿음은 참된 성도로 하여금 실천을 행하도록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 말씀하기 때문이다. 행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이 없다는 것이고,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양심은 더해지고 행함으로 드러난다.

신앙경력은 오래되었는데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양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식은 갖추고 있는지 몰라도 삶을 통해 얻어진 참된 믿음을 갖추질 못했다. 그 참된 지식이 없기에 양심적 행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가르치려고만 하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롬 2:1~5).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결국 믿는 자가 아닌 셈이다. 믿는 척할 뿐이다. 그 안에는 성령도 거하지 않는다(요일 3:24).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에 말씀을 통한 역사도 없다. 그 역사가 없기에 말씀의 순종도 없는 것이다. 결국 양심적 행위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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