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역사신학)

두려운 마음으로 미래의 삶을 늘 생각해야
지옥은 불의하고 불신하는 자들의 장소…평강의 하나님께 감사를

 

미래 삶에 대한 숙고

지옥은 불신자 또는 유기된 자가 가는 곳이다. 신자는 당연히 천국을 간다고 여기기 때문일지, 아니면 종말이 아닌 미래 세계에 관해 무관심한지 모르지만 지옥에 관해 별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다. 현재 장로교가 수용하는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만 아니라 칼빈 선생의 <기독교강요> 3권 8장에서도 미래 삶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고, 이어서 현재의 삶을 다룬다. 이 말은 미래 삶의 자세가 곧 현재 삶의 자세를 갖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무튼 지옥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자.
 

지옥은 있을까?

예수님은 무리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경고하신 적이 있다. 청중은 한결같이 변명을 늘어놓았다(마 25:41). 이뿐 아니다.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눅 16:23)보고 있다고 하셨다.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언하시면서 여러 비유로 말씀하시다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마 8:12; 25:30).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강론하곤 하셨다.

‘지옥’이란 단어는 ‘음부’라는 단어로 신약성경에 10번이나 표기되는데 음부는 곧 ‘불 못’이다(계 20:14). 지상에는 음부의 권세가 있고(마 16:18), 말세에 그 음부는 죽은 자를 내어놓는다(계 20:13). 또 ‘스올’이란 단어는 주로 구약성경에 64번이나 표기된다. 현재 삶의 고통을 지옥으로 표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옥이란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직접 사용하기도 한다.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한다(마 10:28).

신자는 현재 삶 못지않게 미래 삶이 중요하고, 미래 삶은 천국만 아니라 지옥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옥에 가는 부자는?

지옥이란 주제를 특별히 다루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지옥에 간 어느 부자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16장 19~3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색 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고 평가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특정한 부자를 지정하지 않은 것을 볼 때 부자에 초점이 맞추기보다 지옥에 가는 자의 형편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고 여겨진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는 자이다. 그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았다. 왕이 없던 시절인 사사들의 시대를 가리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고 하셨는데 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했고 누리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또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미래 역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그를 위해 준비된 미래는 지옥뿐이었다.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는 십계명에 담겨있다. 특별히 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경고인데, 남의 물건을 직접적으로 훔치지 않았다고 해서 도둑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 말라는 경고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기독교강요> 2권 8장 9항). 남의 재산을 보호하지 않았다거나 부당하게 부를 취하는 것도 이 경고에 해당된다. 더욱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누고 사용하지 않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된다. 자신의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얻는데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대로 사용하고 즐긴다면 이것 역시 8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단 하나의 계명을 어겼지만 전체를 어긴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 등장하는 부자는 이 계명을 어긴 자이다. 가난한 나사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지 못하게 했으니 이 계명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한 셈이다. 가난한 나사로는 자신의 대문 앞에 있었다. 이것은 부자가 언제든 나사로를 도와 줄 수 있는 관계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쾌락에만 눈멀어 있었다. 자신의 것이니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자세는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러한 부자는 헌금에도 인색하다(막 12:44). 전체를 드리는 자세로 헌금생활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드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자부한다. 이런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막 10:25). 또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약 2:6). 결국 지옥에 들어가는 부류에 해당된다(계 6:15). 양적인 면을 보고 우리는 부자라 할 수 없다. 부자의 특성을 볼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유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자세가 없다는 것이다. 또 갑질하는 자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주신 것으로 사회와 교회 및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매우 인색하다. 결국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이런 자를 위해 준비된 것은 지옥 외에는 없다. 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고 심중에 생각한다(눅 12:16).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이런 면에서 부를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 그 결국은 지옥행이다.

 
지옥의 정의

‘지옥’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의 단어로 그리스어 타르타로 또는 하데스라고 표기된다. 타르타로는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단 한 차례 사용되고, 하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의 이름이다. 신약성경에서 주로 사용되는 지옥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의 게힌놈에서(삿 15:8, 18:16) 나온 게헤나이다. 구약성경은 스올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타르타로의 의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악한 자를 위한 지하 감방과 타이탄의 감옥으로 사용되는 깊은 구렁을 의미한다. 철학자 플라톤에 의하면 영들이 죽은 후에 심판 받는 장소라고 한다. 구약성경의 힌놈이란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이다. 이곳은 바알 숭배자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희생 제물로 드린 곳이었다(렘 7:31, 32:35; 수 15:6, 18:16; 대하 28:3). 이사야에서는 도벳이라고 표기되어 불타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스올’이란 의미는 죽은 모든 자가 가는 어두운 곳이라는 것이다.

 
지옥에 대한 묵상

지옥은 어두운 불의 장소로, 죽은 자가 가는 곳이다. 특별히 불의하고 불신하는 자들을 위한 장소이다. 부자가 이곳에서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였다. 불꽃 가운데 지내는 곳이 지옥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의 복수이며 보응이다. 결코 바뀌지 않는 곳이다. 오고갈 수도, 옮길 수도 없는 영원한 운명이다.

영원한 절망적인 선언을 듣자 부자가 하는 말이 지상에 형제 5명이 있으니 나사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여전히 갑질의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또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렇다! 천국만 아니라 지옥에 관해서도 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시켜야 한다. 미리 묵상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선 당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가운데 평강으로 우리 마음을 붙잡는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자(빌 4:7). 이런 면에서 서신서 서두와 마무리에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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