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관순’ 열사는 여성이다. 그렇듯 여성을 빼고는 3·1운동을 논할 수 없다. 1902년생, 열일곱의 어린 여학생이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한 달 후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에 붙잡힌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이듬해 순국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여성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첫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남성을 내조하던 그들이, 3·1운동에서는 주도적이었다. 서울과 개성, 인천, 부산 등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여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국가기록원의 <여성독립운동사 자료 총서>에 의하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중 여성은 180명인데, 그중 10~20대가 75.5%에 달하며, 그 절반이 학생이었다. 이런 여학생들의 활약은 우리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만방에 알린 것이다.

우리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도 기억해야 한다. 영화 <암살>에서의 여성 주인공의 실제 인물은 ‘남자현’이다. 그는 ‘독립군의 어머니’이자 ‘여자 안중근’으로 불렸다.

간호사로 일하던 ‘박자혜’는 3·1운동에서 부상한 많은 조선인을 보고, 간호사 독립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신채호를 만나 가정을 꾸린 후 독립운동을 해, 남편과 자신을 독립에 바친 여성으로 기록됐다.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가담하고 조선에 들어와 3·1운동 준비 중 붙잡혀 고문당한 김마리아. 그녀는 석방 후 조선과 미국에서 애국부인회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다. 시카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최고의 엘리트인 그녀는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는다.

여성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후 여성 인재들이 곳곳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제는 교회 안의 여성을 생각해야 한다. 교회 역시 많은 여성의 헌신으로 부흥해 왔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런데도 교회와 총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제 여성도 그 특성과 능력을 통해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할 것이다. 3·1운동 105주년에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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