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동서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접적인 원인이 한 마디의 말실수 때문이라는 보도다. 한 마디로 넌센스 같은 얘기다. 아이들 땅 따먹기 놀이도 아니고 허풍이 젖어있는 도박판도 아닌데 말이다. 1989년 11월 9일 여행 자유화 조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시행시기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동독 정치국 대변인 샤봅스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뫼비우스의 띠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는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곡면의 2차원 도형이다. 1858년에 독일의 수학자 A. F 뫼비우스가 발견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미소에서 대각선으로 연결 된 피댓줄은 뫼비우스의 띠가 실제로 적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피댓줄을 대각선으로 연결하면 안과 밖이
가을에는 산이다. 가을산은 한여름의 물기를 털고 차분하게 야위어 가며 시선을 잡는다. 평소 무감각한 사람들도 가을을 탄다. 한번쯤은 들판을 지나 산으로 간다. 계절의 절정을 맞고 있는 산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단풍이 지는 숲에서 인생을 본다. 원색의 향연들을 보며 잠시 황홀함에 젖기도 한다. 그 속에서 고단한 삶을 잊어 보는 것도 산행의 중요한 의미다
힘(파워) 힘은 가치를 결정한다. 그런가하면 가치는 힘의 척도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처럼 힘과 가치의 양립관계는 따지기 어려운 논제다. 다만 함께 존재하고 공생하는 상관관계임은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가치를 지닌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빌딩이나 모퉁이의 돌맹이도 가치가 있다. 다만 그 가치는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성이 있으며 유익을 끼치는가에
긍휼 계절이 가을의 문턱을 넘고 있다. 똑같은 하루지만 분위기가 다르고 느낌이 다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가오고, 여린 마음에 그리움과 고독한 아쉬움들이 채워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중 하나다. 그래서 이즈음에는 가슴 아린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닥친 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들판을 바라보
서만수 선교사 총회를 앞두고 서만수 선교사의 소천소식을 들었다. 선교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던 1971년 인도네시아에 파송받은 서만수 선교사는 40년동안 외길을 걷다가 그가 평소 다짐하던 대로 선교지에 뼈를 묻었다. 120년 전 한국에 복음을 심던 언더우드 선교사처럼 그는 선교의 모범을 실천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기독신문사 기자로도 활동했
데스크칼럼 참기도 호주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참사람 부족’의 기도는 특이하다. 자연치료법을 전공하고 호주 ‘보건사회화센터’에서 일하던 미국인 여의사 말로 모건이 원주민들과 함께 도보여행을 경험하고 만든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라는 책에는 참사람부족의 독특한 의식과 삶의 모습
흔적 꽃을 바친 손에는 향기가 남아있고, 도움을 베푼 손길에는 훈훈한 인정이 남아있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도 자국이 있고 하다못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도 흔적은 남아있다. 미풍이 지나간 뒤에는 상쾌함이 남아있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가 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져있는 남녀의 마음에는 살맛나는 행복이 들어있고 유난히 햇살이 좋은 해엔 토실하고 빛깔 고
권력 부자 3대 가기 어렵고(富不三代), 권력 10년 넘기 어렵다(權不十年)는 말이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으니 겸손 하라는 말이다. 유명인과 권력자들의 주검을 보면서 생의 무상함이 새롭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좋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신은 인간에게
문명의 충돌은 대양판이 부딪치는 지진과 같고, 때로는 바닷물에 유입되는 강물과 같다. 공포스럽고 경이로우며 미묘하다. 문명의 충돌은 때론 반발하고 때론 융화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든다. 선교는 문명의 충돌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며 이민족과 이교도의 만남이다. 서로간의 유익이나 편의를 위해 만나는 쌍방향적 만남과는 다르게 목적이 분명한 일방적 만남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인생에서 가장 많이 비유되는 명제 중 하나다. 만남과 헤어짐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삶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한다. 자연계에는 천적이 존재하고 인간세계 역시 먹이사슬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연은 순환으로 유지되고 순환의 원리는 신이 만든 법이요 질서라고 한다. 자연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아이작 뉴턴은 “자연은 일정
산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메워가는 과정은 각자 다르다. 수많은 분노와 희열이 있고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며 어느 때는 한없는 나락에서 허덕이기도 한다. 인생의 말미에서 느끼는 회상은 대부분 뿌듯함보다는 후회와 허탈함이라고 한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스펙트럼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의지대로 안된다는 점에서 양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유토피아는 1516년 토마스 모어가 이상향을 그린 소설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상세계를 쫓는 인간의 꿈은 이전에도 있었다. 15세기 초 보헤미아에서 교회개혁과 영주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후스파 신자들 중 한 집단이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갈수 있는 길은 아담처럼 사는 것이라고 믿고 프라하 인근에서 한 공동체를 만들고 아담파를 만들었다. 나
종교행위는 연대의식에서 비롯되고 유지된다고 한다. 연대의식은 공감과 동정에서 비롯되는데 어원적으로 공감과 동정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공감(sympathize)은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됐고, 동정(compassion) 역시 같은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행위는 함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생명을 담고 있는 사람의 몸은 71%의 물과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나트륨, 0.4%의 염소, 거기에 미소량의 마그네슘 구리 요오드 니켈 납 주석 등의 화학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 성분들이 각각으로 존재할 때는 한 성분에 불과하지만 환경과 조건을 갖추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는 인간이라는